독자 여러분께 보내는 슈도힐링의 편지 - 열여덟 번째

표지

표지 이미지 저작권은 슈도힐링 작가 님에게 있습니다.


  "후우..." 

  하진의 작은 한숨이 입가에 머물다 사라졌다. 
  그러곤 곧 초점 잃은 시선이 노트북 화면 한 가운데, 정확히 어딘지 모를 곳에 머물렀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곁에 누군가 있었다면 알아챘을 만큼, 하진은 그렇게 잠시 멍하니 멈춰있었다. 

  꼿꼿이 세웠던 허리는 이제 막 구부정해졌다가, 방금 입에 댄 다 식은 커피 덕에 얼마 늘어져 보지도 못하고 다시 곧추섰다. 

  "아이, 텀블러 하나 살 거야." 

  하진은 일어나 거실로 나가다 말고 서랍을 열어 도톰한 수면양말을 꺼내 신고는, 영 시원찮은 오래된 텀블러를 들고 방을 나섰다.
  집이어도 이제 맨발은 추운 한겨울이었다. 

  '쪼로로...' 

  떨어지는 커피 향에 또다시 식탁 위 어딘가에 시선을 빼앗겼다. 
  소리가 멈추고, 뜨거운 김을 타고 날았던 커피 향이 옅어질 때쯤 정신을 차리고 머그잔을 손에 들었다. 

  "후우..." 

  다시 짧은 한숨 뒤 커피 한 모금. 
  나른한 기운이 온몸에 다 퍼질 때까지 양손으로 잔을 감싸 쥐고 그대로 서 있던 하진이 다시 방, 책상에 앉자마자 '또롱'하고 울리는 알람 소리.
  하진은 몸을 늘어뜨리듯 의자에 깊이 앉아서는 디딘 한발에 힘을 주어 의자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것인지, 어떤 것도 생각할 여력이 없었던 것인지.
  하진은 꽤 한참, 왼쪽 오른쪽으로 의자를 움직여가며 그렇게 기운을 쭉 빼고 앉아만 있었다. 

  드디어, 드디어 올린 구인 글이었다. 
  작정한 걸로 보자면 반년, 첫머리 운을 뗀 것으로만 따져보아도 2주.
  이른 출근과 늦은 퇴근에도 도무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바쁜 연말 스케줄에도 하진은 시간을 더 쪼개고 잠을 아껴 꼬박 2주간 구인 글을 썼다. 

  머뭇거리고, 망설이고, 고민하고, 작심하여 마지막 한 줄까지를 고치고 또 고쳐 적기까지. 하진은 짧지도, 가볍지만도 않은 글에 생각과 마음을 구기고 접어 꾹꾹 눌러 담아 놓았더랬다. 

  아직 마침표 잉크도 채 마르지 않은 그런 글에 벌써 기별을 한 이는 어떤 사람일까. 

  다시 '또롱'. 

  고개는 등받이에 그대로 다 기댄 채로, 하진은 눈만을 내리깔고 책상에 놓인 핸드폰에 거듭 뜨기 시작한 알림을 쳐다보았다. 

  으레 겪어 온 일이고, 으레 겪을 줄 알았던 일이었다.
  10여년 전이나 지금이나 이 방법 말고는 상대를 만날 딱히 다른 길이 없으니 당연히 이쯤은 감당해내겠단 각오가 있었다.
  이것만 아니라면 절대 어울리고 싶지 않은 그들 안에 '그'가 반드시 있을 것이므로, 그렇다면 기꺼이 그들까지 감당해내겠단 각오가. 

  비록 벌써 조금 휘청한 듯했지만. 

  영혼 없는 손짓으로 화면을 새로 고쳤다.
  그새 올라간 무시무시한 조회 수, 점점 잦아지는 알람, 늘어가는 '새 쪽지'의 개수, 오로지 구인을 위해 만들어 둔 계정의 새 메일 알람까지. 

  이 많은 일에도 마음은 조금도 두근거리지 않았으므로, 하진은 그 중 아무것도 열어보지 않은 채 다시 한번, 또 한 번, 재차 창을 새로 고치기만 했다. 

  '이번엔 꼭 만날 거다.' 

  하진의 인생 중에 이렇게 자신 없는 결심이 또 있었을까.
  그러나 대단한 결의였다.
  결혼을 약속했던 애인에게 파혼을 말하기로 마음먹었던 일 년 여 전 그때만큼이나. 

  성도, 이름도, 나이도,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아무개를 향한 호소.
  발가벗듯 나를 다 드러낸 채로 좀 만나주십사. 

  대단한 각오와 결의와 결심이 있어야만 시도라도 해볼 수 있는 일.
  하진에게 이건 그 어떤 일보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누구 앞이라 한들 부끄럽지 않게, 근면 성실하고 모범적으로 세상을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하진이 사람을 이렇게밖에 만날 수 없는 이유야 물론 있었다. 

  서하진은 성향자다.
  스팽키이고 마조이자 서브. 
  아니 곧 서브가 될.
  서브가 되고 싶은. 

  거기다가 스팽커도, 사디도 아닌 도미넌트, '주인'을 기다리는. 

  ... 

  이렇게 정리하고 보니 굉장한 성향이자, 조건이 아닐 수 없다. 

  아무튼, 서하진은 성향자다. 

  "아니야. 서브가 되고 싶은...? 음... 섭이 되고 싶은...? 서브가...? 섭...? 아냐. 그냥 이렇게." 

  하진은 이미 올린 글을 빠르게 다시 한번 훑고는, 끝까지 수정을 거듭하던 마지막 구절을 다시 읊조리다 창을 옮겼다. 

  <실시간 인기 글> 

  '당신이 무엇으로든 저보다 나은 사람임을...' 

  고심해서 지어 넣은 제목을 보자마자 피식, 하진이 웃었다.
  무려 인기 글이다. 

  "쓸데없이 진지해." 

  "나다... 그게 나야..." 

  몇 마디를 혼자 중얼거리며 히죽거리다 보니 그새 가라앉았던 기분이 제법 괜찮아졌다. 

  올해 하고 싶었던 일 중 어쩌면 가장 하고 싶었던 일 하나를 마쳤다.
  올해를 하루 남기고 겨우, 그렇지만 훌륭하게. 

  "이제 일기... 일기장이..." 

  나름 기록할 만한 날이었으므로. 슬슬 무거워지는 눈꺼풀에 힘을 줘가며 일기 몇 줄을 끄적였다.  

  곧 양발을 비벼 도톰한 수면양말을 바닥에 벗어두고, 새로 내린 커피는 거의 마시지 않은 채 두고,
  하진은 그대로 침대에 올랐다. 

  이제 스탠드 스위치만 내리면 잠들어야 할 어둡고 깜깜한 밤이었다. 

  하진은 몸을 웅크려 이불을 더 바짝 말아 덮고 폰에 모아 둔 플레이리스트를 뒤적였다.
  왠지 오늘은 조용히 잠들고 싶지 않아서. 

  무슨 마음으로 골라두었던 곡들이었는지.
  철저하게 혼자 보낸 올 한 해의 일들이 순서도, 맥락도 없이 떠올랐다.
  그러고 나니 그보다 더 먼저였던, 행복하여 슬펐던 지난해의 일들도 하나둘 떠올랐다. 

  감히 떠올릴 수도, 그리워할 수도 없었던 날들. 

  하진은 한참 그렇게 음악을 바꾸고 다시 또 바꿔 들어가며 마구잡이로 쏟아지는 생각들을 막지 않고 취해있다가 불빛이 밝은 줄도 모르고 그대로 잠들었다. 

  아주 깊고 긴, 밝은 밤 단잠이었다. 

 


  따지고 보면 하진이와 지후의 역사는 하진이가 구인 글을 올리는 날로부터 시작하였으므로.
  그날의 이야기를 조금 가져와 보았습니다. 

  이 날이 지후에겐 어떤 날이었는지도 적어 보려다가, 큼큼...
  들려드릴 날이 또 있겠지요. 

  하진이와 지후의 모든 디데이는 처음 만난 날이 아니라 한달짜리 디엣 해보자 했던 2023년 1월 29일부터 카운트하였습니다.
  그날로부터 딱 3년.
  오늘 하진이와 지후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요? (퀴즈 아님 ㅋ 

  단행본 출간 일정을 조금 더 구체화하였지만, 아직 공지하지는 않겠습니다.
  중간 과정 중 하나가 일단락되면 러프하게라도 일정을 전해드려 볼게요. 

  독자님들은 어떤 이야기가 올라오길 기대하셨으려나.
  지후 이야기가 없어서 조금 실망하셨을지도. 

  하지만 오늘도 저는 뚝심 있게 제가 전해드리고 싶었던 이야기만을 놓고 갑니다. 

  또 어느 날 선물같이 뜬금없는 글을 들고 올게요. 

  독자님들이 도무지 예상할 수 없는 글들만 들고 오고 싶다아-! ㅋ
  제 욕심입니다. 

  그럼 우린 다음 주에 다시 만나요. 

  독자님들도 저처럼 뚝심 있게 댓글 또 남겨 주실 거지요? 
  푸쉬. 맞아요. ㅋ 

  건강하시길.
  그리고 늘 바라요. 모두 행복하시길. 

  그럼 또 만나요! ♡

8 댓글

  1. 퀴즈 아님에 빵🤣🤣🤣🤣🤣🤣🤣
    서술 할 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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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어느 시점의 이야기라도, 누군가의 이야기라도 지후하진의 입체감이 뚜렷해져서 언제나 반갑고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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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1등1등~~~ 잠이 안 와서 뒤척이다가 12시가 지났길래 혹시 하고 들어왔는데 29일이라 쨘 하고 올라와 있는 글을보니 반가운밤이에요ㅎㅎ 물음표를 던져주시고 퀴즈가 아니라니요🤣 둘은 잘 있..겠죠...?!ㅋㅋ(보고싶어라) 지후 얘기 아니라도 올려주는 건 뭐든 좋은거 아시면서~~ 다음주에 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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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니 글 읽을땐 댓글이 하나도 없어서 1등으로 적었는데 등록하고보니 2등이군요?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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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구인글이지만 하진이가 어떤 사람인지가 더 잘 보였던 글. 제가 좋아하는 하진이의 구인글!! 함부로 덤비지 말라고 그렇게 써놨건만 불나방이 떼거지로 또롱또롱..ㅋ
    성향자로 자기정의를 내린다는거 쉬운일 아니죠. 그것도 성실하게 모범적인 삶을 살면서 말이죠. 저는 그래서 하진이가 좋아요. 성향도 쟁취다!!
    (근데 하진이 글쓰는 모습이 작가님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의자 빙글이랑 발 비벼 양말을 벗고 침대 들어가는거...이거 실화다 음... )
    작가님!!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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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슈사로사♡29/1/26 07:33

    작가님 선물같은 진짜 선물인 글 감사합니다♡♡ 우리모두가 사랑했던 하진이 구인글♡ 하진이 다운글♡♡ 진짜 처음 홀딱반해서 여기까지 ♡♡ 진짜 다시봐도 너무 좋아요♡
    작가님 3년이 지난 지금도 둘이 아주 혼나고 혼내고 있을꺼라 믿어요♡♡ 작가님 늘 화이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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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민들레씨앗30/1/26 00:47

    하진이의 3년..우리 여기 늘 작가님과 일심동체인 분들과 저도 살짝이 함께하고 있음을 남겨요^^ 늘 응원하고있고 소장각 기다리고 있어요~~부디 작가님 하시고 싶은대로 꺼리낌없이 다 이루어지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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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하진이가 구인하고있어서 심장이 철렁했어요ㅠㅠ 다행히 때주나 어당주에서도 안나온 비하인드였군요!!
    우리 하진이 사고뭉치 서마조지만 3주년 지후와 잘 보냈겠죠??

    그리고 이제 곧 출간소식을 들을 수 있는건가요😆 근데 한가지 바람이 있다면 실물책은 부디 제발 배송 할 때 책 이름이 안나오게[도서]식으로 송장에 적혀있길 바라요!!!ㅠㅠ 책 이름이 나오면 배송기사님이나 주변에서 누가봐도 성인소설 배송인거 다
    알 거 같은지라... 꼭 제발 도서 식으로 배송되길 건의해봅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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